
여권, 비자, 신용카드, 환전한 약간의 용돈, 옷가지, 비상약, 세면도구, 화장품, 카메라, 알람시계와 가이드북... 이 정도에서 짐 싸기를 그쳤다면 좋았을 것을, 막상 가방을 닫으려니 왠지 허전하고 불안한 느낌이 들었다. 비자카드가 통하지 않을지도 모르니 마스터카드도 한 장 넣어야 할 것같고, 편도염에 쓰는 약만 넣으려니 콧물약과 기침약도 필요할 듯하고, 무더운 날씨에 대비해 민소매에 반바지만 챙기자니 갑자기 추워져 고생할까 봐 긴소매도 몇 벌 챙겨야 할 것 같았다. 주섬주섬 챙겨 넣자니 넣을 수록 걱정이 더 커졌다.
설사병에 걸릴까봐 지사제를 챙기고 나면 뜬금없이 변비가 생길까 봐 관장약도 가져가야 할 것 같고, 호텔에서 제공하는 욕실용품이 못 미더우니 샴푸와 목욕비누도 따로 준비해야 할 것 같고, 나중에는 여행기간에 자라날 손발톱과 생겨날 귀지가 걱정돼 손톱가위와 귀이개 까지 챙겨넣었다. 이미 여행가방을 가득 차 있었지만 그럼에도 쉽사리 가방을 닫고 지퍼를 채우지 못했다. 음식이 입에 맞지 않으면 어떻게 하지? 출출하면 야식이라도 먹어야 할 텐데, 저녁엔 노독을 풀며 일행과 술 한잔을 기울일 일도 생길 텐데.. 결국 컵라면과 고추장에 안줏거리 까지 싸 넣었다. 이쯤에서 가방은 뷔페에서 폭식을 하고 나올 때의 배 모양으로 빵빵하게 부풀어 있었다.
하지만 그 무겁고 커다란 짐을 낑낑거리며 끌고 와 도착지에 풀어놓았을 때, 정작 알뜰하게 쓸모있는 것은 그리 많지 않았다. 실내복은 치마와 바지 하나씩에 티셔츠 두어 개면 적당했고, 외출복도 챙긴 것에 절반쯤이면 충분했다. 속옷과 양말은 그때 그때 빨아서 에어컨 바람에 말리면 되고, 한국 식품들은 호텔 주변 상점에서 쉽게 발견할 수 있었다. 빡빡한 일정을 뻔히 알면서 어느 짬에 읽겠다고 책은 왜 그리 바리바리 싸 짊어 지고 왔는지!! 날이 갈수록 줄어들기보다 늘어나기만 하는 짐에 부글부글 짜증이 끓어 오를 지경이었다.

그곳에도 사람이 살고 있기에 정 필요하다면 구라지 못할 것도 없고 대체하지 못할 것도 없거늘, 익숙지 않고 낯설다는 이유만으로 지레 겁을 집어 먹었던 것일까? 두려움 때문이리라. 쓸데없는 경계심을 품었던 탓이다. '만일 하늘이 무너지면 어디로 피해야 할까?' 를 고민하며 전전긍긍한 기우의 고사가 남의 일이 아니다. 부처는 강을 건너고 나면 뗏목을 버리라 했고, 장자는 고기를 얻었으면 통발을 잊으라 했다. 그 가르침에 감화돼 고개를 주억거린 건 분명한데, 얼토당토 않게 도사연하며 없으면 없는대로 살겠노라 부렸던 호기는 어디로 갔나? 헛된 욕심이다. 교활한 자기기만이다. 필요이상의 소유물은 고스란히 탐욕인 것을, 아무리 덜어내려고 해도 나는 여전히 무언가를 움켜쥔 채 쩔쩔매고 있나 보다.
여행을 잘하는 사람의 짐은 크지 않다. 그래야 이동하기 쉽고 운신이 편하기 때문이다. 인생을 여행에 비유한다면 인생길에서 짊어지고 가는 짐도 여행길의 그것과 마찬가지다. 부피에 비해 무게가 무거운 몽근짐을 저마다 이고 지고 가야 하는건 어쩔 수 없대도, 허황된 부피까지 키울 까닭은 없다. 보기에는 작지만, 열어보았을 때 꼭 필요한 것들이 살뜰히 구비된 여행가방을 꾸리고 싶다.
가뿐하고, 단출하고, 비로소 자유롭게.
결국 돌아올 때는 수하물 중량이 초과돼 추가 요금을 내고 말았다. 강을 건너 언덕을 오르면서도 뗏목을 짊어지고 헉헉거리며, 고기를 잡아 구워먹고 지져먹고 나서도 통발을 질질 끌고다니며,
나는 앞으로 얼마나 더 어리석어야 할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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